HONG SUNGYONG LENTICULAR 3D ART

CRITIQUE

MARY GREGORY 평론 — 미술사학자 · 평론가

그의 렌티큘러 프린트에서는 깊이와 층위가 놀라운 3차원의 이미지로 떠오른다 — 검은 바탕 위로 선명한 색의 원과 소용돌이가 튀어나온다. … 그는 1960년대 옵아트 운동, 그리고 동시대 미술에서의 그 부활과 강하게 맞닿아 있는 작업 세계에 도달했다.

홍성용은 일흔 겹이 넘는 레이어를 쌓아 이 놀라운 입체감을 빚어내는 복합적인 기법을 창안했다. 그것은 나무나 금속 위에 수지를 겹겹이 올려 정교한 입체 조각을 가능케 했던 동아시아의 전통 칠공예를 연상시킨다. … 가장 단순한 패턴 — 원과 선 — 을 통해 그는 우주의 공허와, 동시에 상상력이 지어낸 무한한 우주들을 관람자 앞에 데려다 놓는다.

“Noise”가 명상적 침묵을 데려온다면, “Heuristic”은 정답이 없는 탐색으로 관람자를 끌어들인다. 홍성용은 오직 예술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수행한다 —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일.

In his lenticular prints, depths and layers emerge in striking three-dimensional images, where circles and whorls of bright colors jump out of a black ground. … He has arrived to a body of work that relates strongly to the Op-Art movement of the 1960s and its current resurgence in contemporary art.

Hong has created a complex technique, in which over seventy layers are applied to achieve this startling three-dimensionality. It is reminiscent of eastern traditional lacquerware, in which numerous layers of resin were applied to allow for highly developed three-dimensional carvings. … Through the simplest of patterns, circles and lines, Hong brings to viewers an image of the void of space, and at the same time, the endless invented universes of the imagination.

Interestingly, the series “Noise” brings a sense of meditative silence, and “Heuristic” engages the viewer in an exploration for which no definitive answer can be found. SungYong Hong performs the task only the artist can — to pose questions that are unanswerable.

— Mary Gregory, 미술사학자 · 평론가. “Heuristic & Noise” (Able Fine Art NY) 전시 평론에서 발췌

고경옥 평론 — 이랜드문화재단 수석 큐레이터

“홍성용의 The Creation 시리즈” — 고경옥, 이랜드문화재단 수석 큐레이터

원색의 소용돌이치는 둥근 형상. 반추형도 있고 나선형도 있는데 대개가 원형을 띠고 있다. 천체망원경으로 우주를 찍은 은하계의 모습, 혹은 행성이 사라진 흔적인 블랙홀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마치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보이는 아련한 잔상이 시각화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품의 주된 형상은 우주라는 광활한 시공간에 대해 우리가 지닌 관념화된, 혹은 실제적인 이미지를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홍성용의 작품은 화면의 중심부에 집중되는 이미지이다. 그런데 이 중심축은 보는 각도에 따라 움직이며, 시선의 이동과 함께 형상도 움직인다. 그러니까 보는 나를 따라 움직이는 듯한 환영을 일으키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2차원의 평면에 출력한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홍성용만의 독특한 작업 방식인 3차원의 공간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Hong Sung Young’s work demonstrates round swirling forms in primary colors. Some are pyramidal or spiral shapes but are mostly circular in form. These shapes hark back to images of galaxies taken by an astronomical telescope or black holes bearing the marks of planets. At times, they look like a visualization of the dim afterimages one sees when one opens their eyes suddenly. The primary shapes of his work look like idealized or practical images we have concerning the vast space-time of the universe.

Hong’s works show images concentrating towards the center. The central axis moves in accordance with the visual angle, and the shapes seem to move with the eyes. Hong’s unique way of working brings about a feeling of three-dimensional space.

한국어 전문 보기

홍성용의 작업은 제작방식과 작품의 내용상에 다양한 층위를 지닌다. 그의 작업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형식상으로 렌티큘러(Lenticular) — 두 가지 이미지를 겹치고,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이미지가 보이는 필름과 같은 평면 재질 —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만의 독특한 작업과정과 방식, 그리고 결과물로 헤아려보자면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기술적인 메커니즘이 작품의 큰 뼈대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작업과정을 유심히 보자면, 작가는 사진이라는 매체와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보이지 않는 노이즈(Noise)를 채취한다.

채집된 이미지를 다시 재조합해 작가가 의도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것을 토대로 거리에 따른 각도와 시선을 계산해 3D작업으로 무수히 많은 레이어가 쌓인 1장의 작품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작가는 디지털 기술을 통한 3차원 그래픽과 렌티큘러라는 재료를 통해 입체적인 화면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러한 홍성용의 작품이 여타의 렌티큘러 작품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2개의 이미지가 아니라, 시선이 이동하는 순간순간마다 이미지가 바뀌며 보다 실제적인 입체 공간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홍성용의 작품은 3차원의 가상공간을 수십 장의 화면을 겹쳐 만듦으로써 홀로그램보다도 더 실제적인 이미지로 완성시켰다.

그렇다면 이토록 고된 제작과정을 거쳐 탄생되는 이 작업이 말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 작품의 제목 “Heuristic”은 그 단서를 제공한다. “Heuristic”은 ‘체험적인’이란 뜻으로 경험적 지식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의 연구방법론을 말한다. 작가는 경험을 통해 자신이 지닌 삶의 의문을 해결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오래전부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진 이 세상을 표현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있고, 어떠한 도구를 사용해야만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그 어떠한 것으로도 볼 수 없는 존재하는 것들 말이다. 이처럼 그는 존재하지만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시각적인 느낌을 작품화한 것이다. 또한 작품에 더 깊숙하게 들어가 보면 우주 창조 원리, 무한한 공간의 존재에 대한 관심, 더 나아가 자기 근원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표현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고민은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서 누구나 고민하는 보편적인 문제이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묵직한 질문을 가슴에 안고, 이를 풀어내고자 하는 작가의 진지한 창작태도가 고스란히 작품 안에 녹아있다.

홍성용 작가는 최첨단의 과학기술을 작품에 도입해 예술창작에 있어 매체가 주는 무한한 가능성의 한계를 실험하고 있다. 재료의 실험으로 새로운 창작방식을 만드는 것에 끝나지 않고, 경험에서 얻어낸 것을 통해 자신이 지닌 삶의 의문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확실하게 정의할 수 없고,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철학적인 문제에 접근하며, 이에 대한 해답으로 “Heuristic” 시리즈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때 그 막연한 느낌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시각화한 작가의 감각이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홍성용의 작품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세계를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에는 생성과 소멸, 다시 생성되며 순환하는 자연의 질서를 바라보는 작가의 세계관이 무의식적으로 투영되어 있으며, 동시에 자기 근원에 대한 원초적이고 철학적인 물음이 깊게 녹아 있다. 작품 표면의 무수한 파장과 흔들림, 역동적인 소용돌이와는 대조적으로 작품과 만났을 때 드는 명상적이고 고요한 숭고의 미를 느끼게 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 있다. 가볍지 않은 창작태도와 예술을 대하는 진지한 탐구정신이 작품성을 한층 돋보이게 하는 지점이다.

READ FULL TEXT — EN

Hong’s work varies in its method and content. In short, however, his work can be defined as lenticular work in terms of form. Considering his own distinctive working process, ways, and products however, his work comes through diverse technical mechanisms that cannot be defined so simply. Under close examination of his work, the artist collects invisible noises through the medium of photography and other diverse media. He creates intended images by recombining them. The images are reborn into one work with countless layers from 3D work by calculating visual angles in accordance with distance. The artist gives rise to three-dimensional images with 3D graphic and the lenticular by using digital technology.

Hong’s work is differentiated from other lenticular work in that his work generates practical three-dimensional space as images change whenever our eyes move. Hong’s work forms three-dimensional imaginary space more realistic than holograms by overlaying dozens of images. So what’s the content of his pieces, which he gave rise to after such a difficult process? His work title Heuristic offers a reply to the question. The term “heuristic” refers to experience-based techniques for problem-solving, a methodology to give solutions based on empirical knowledge. The artist discovers amazing techniques with his experience and solves his questions concerning his life.

The artist has long held the idea of representing the world made up of the visible and the invisible. Something is visible to human sight whereas other things are visible only by using a tool, or things remain invisible even though they obviously exist. He represents what he feels to the existent yet invisible. His work can also be interpreted as a representation of the principle of universe-creation, his concern for existence in infinite space, and his questioning of the source of his being. These are common questions everyone may raise beyond any religious dimension. Asking the philosophical, heavy questions “Who am I; Where do I come from; Where am I going?” his serious attitude regarding these questions seeps into his work.

With the introduction of cutting-edge science and technology to his work, Hong experiments with the infinite possibilities of mediums. A new way of creation is not all he attains through his experiments with mediums. He raises a questioning of life to the level of an artwork through what he learns from experience. He has access to a philosophical problem apparently undefinable and easily unanswerable, and has made the Heuristic series a reply to such a problem. His sense of visualizing a vague feeling here in his own distinctive manner can be considered remarkable.

Hong’s work is a projection of an invisible yet obviously existent world. His works are an unconscious reflection of his view of the world, the order of nature, the cycles of creation and extinction, melted away into a primal, philosophical question regarding the source of himself. This is why we can feel a meditative, serene, and sublime beauty in his work despite the numerous waves, swaying, and dynamic vortex. His heavy work-attitude and serious enquiring mind within art makes his work’s artistry look much more conspicuous.

— 고경옥, 이랜드문화재단 수석 큐레이터. “The Creation” (E-LAND SPACE, 2014) 전시 평론

PRESS 보도

러 홍성용 전 “여기서 영원까지 Here to Eternity”YTN 와이파일 · 홍상희 기자 · 2020. 3. 18.

TV 화면조정이 끝나면 시작되는 미지의 세계

1980년대, 편성된 방송이 모두 끝나고 나면 무지개 빛깔의 띠처럼 보이는 TV 화면조정 시간이 잠시 이어지다 ‘칙’하는 소리와 함께 흰색과 검정색 점이 가득 섞인 회색 화면이 나왔습니다. 정규방송이 끝나 더는 TV 프로그램이 없다는 걸 알려주는 ‘장면’이기도 했는데, 당시 어린 마음에 이러다 다시 총천연색 만화가 나오지 않을까 그 회색 화면을 몇 분이고 바라보고 앉아있었던 기억도 납니다. 마치 영화 <플레전트빌> 속 흑백세계가 색깔을 찾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그 회색화면은 방송사로부터 TV가 아무런 전파도 수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백색 소음(white noise)’만 가득한 상태였던 거죠.

사진작가 출신의 홍성용 작가는 어릴 적부터 ‘이 TV 속의 백색 소음 속 세상에는 무엇이 있을까’ 상상력을 키워왔다고 합니다. 눈을 감았을 때 찰나의 짧은 시간 속에 보이는 형상이 TV 속 백색 소음 화면과 비슷하게 보였던 것이죠. 홍 작가는 어쩌면 무의식의 세계는 그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왔다고 합니다.

존재의 시작과 끝, 근원적인 공간을 탐구

“저는 생각했습니다. 엄마 배 속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볼까? 사람은 마지막 순간 무엇을 볼까? 어쩌면 우리가 눈을 감았을 때 보이는 공간이 우리가 있었던, 원래 존재하던 곳이었고, 노이즈와 같은 점들은 나, 또는 타인, 결국 우리의 조각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더 나아가 근원적인 공간은 결국 신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홍성용 작가의 작품은 모두 4개의 시리즈로 구성돼 있습니다. Noise, Darkness, Heuristic, Beyond로 이어지는데요. 노이즈 시리즈는 근원적 공간에서 노이즈를 만나고, 노이즈를 통해 나를 깨우치는 과정인 다크니스 시리즈는 암흑의 형태를 상상으로 표현했습니다. 휴리스틱 시리즈에서는 영원한 삶을 원하는 인간이 무한을 마주했을 때를, 비욘드 시리즈는 근원의 공간에 신과 인간의 탄생을 이야기하고자 했다고 설명합니다.

작품을 한 번 볼까요?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작품 속 추상적 형상이 움직입니다. 아니 소용돌이친다는 표현이 맞을 듯합니다. 마치 평면 저 너머에 갇힌 용암이나 우주처럼, 손에 닿으면 언제라도 평면을 넘어 튀어나올 것 같습니다.

카메라 속 노이즈를 재료로 수십 장 사진 · 드로잉 재료 겹쳐

작업 과정을 직접 들여다봤습니다. 작품의 재료는 ‘노이즈’입니다. 그렇다면 소리로 뉴미디어 작품을 만든다는 것일까요? 그건 아니라고 합니다. 디지털 카메라의 전원을 켰을 때 이미지를 센서가 포착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전자 노이즈를 모아 재료로 쓰는 겁니다. 수채화나 유화의 재료가 물감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디지털 카메라 렌즈를 막고 그곳에 흐르는 노이즈를 획득합니다. 이 노이즈를 위치에 따라 가상의 카메라 72대를 배치, 촬영해 여러 모양을 확보한 뒤, 그 위에 드로잉으로 터치한 노이즈 수십 장을 배치합니다. 그리고 사진 인화지로 프린트한 다음, 마지막으로 형상을 굴절되게 표현하는 특수재료 렌티큘러에 이 프린트를 붙이면 하나의 작품이 완성됩니다.

짧은 순간에 머무는 인간이지만, 결국 영원한 존재

추상과 구상의 이미지를 3D로 표현한 홍성용 작가의 시리즈가 3월 20일부터 7월 19일까지 러시아 에라르타 현대미술관에서 초청 전시됩니다. Noise 1번, 휴리스틱 1-1번, 비욘드 1번 등 모두 42점이 전시되는데, 신진작가가 러시아의 대표적인 현대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갖는 건 이례적인 일입니다.

휴리스틱 1-1번 작품처럼 블랙홀을 연상하게 하는 작품이나 우주 속 은하처럼 추상적인 형상에서 인간의 얼굴이나 손과 발 등의 신체까지, 작가가 담고자 하는 내용도 광활한 우주와 심연의 바다와 같은 존재의 근원에서 신과 인간으로 변화해 옵니다. 영상의 노이즈로 존재의 시작과 끝이 되는 근원적인 공간을 탐구하고 싶다는 홍성용 작가는 이번 전시의 의미에 대해 “눈을 감을 때 보이는 무언가에 대한 작은 호기심을 시작으로 인간과 신으로의 확장까지 작품의 큰 흐름을 볼 수 있는 전시”라고 말했습니다.

— YTN 와이파일, 홍상희 기자 (2020. 3. 18.) · 기사 원문 보기 →

GALLERY NOTES 갤러리 노트

솔직히 말하면, 렌티큘러라는 단어 앞에서 나는 한 번 멈칫한다. 각도에 따라 움직이는 그림 — 그것은 너무 자주 기술의 묘기로 소비되어 왔고, 옵아트의 유산은 기념품 가게 진열대까지 흘러내려 왔다. 홍성용의 작업 앞에서도 나는 같은 의심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의심은 절반쯤 무너졌다.

그의 노이즈는 장식이 아니라 재료다. 카메라 센서가 어둠 속에서 뱉어내는 전자적 잔여물 — 보통의 사진가라면 지워버렸을 그 찌꺼기를 그는 일흔 겹 넘게 쌓아 올린다. 그 결과물은 화면이 아니라 깊이이고, 이미지가 아니라 장소다. 관람자가 몸을 움직여야만 비로소 완성된다는 점에서, 이 작업은 회화보다 조각에, 조각보다 의식(儀式)에 가깝다.

내가 아직 유보하는 것은 이 언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노이즈와 소용돌이의 어휘는 강력하지만, 자기 안에 닫힐 위험이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의 실존’이라는 그의 명제가 진심이라면 — 그리고 이 작품들의 침묵이 그 진심을 증언한다면 — 나는 그가 다음에 무엇을 보여줄지 기다리는 쪽에 서겠다. 기대가 크다.

I will admit it: the word “lenticular” makes me pause. Images that shift with the viewing angle have too often been spent as technical novelty, and the legacy of Op-Art has trickled all the way down to the souvenir shelf. I began in front of Hong Sungyong’s work with precisely that suspicion — and about half of it did not survive.

His noise is not decoration; it is material. The electronic residue a camera sensor exhales in darkness — the very thing a photographer would erase — he layers more than seventy times. What results is not a picture but a depth; not an image but a place. Because the work completes itself only when the viewer moves, it belongs less to painting than to sculpture, and less to sculpture than to ritual.

What I still withhold is the question of how far this language can travel. The vocabulary of noise and vortex is potent, but it risks closing on itself. Yet if his proposition — the existence of the invisible — is sincere, and the silence of these works testifies that it is, I would rather stand with those waiting to see what he shows next. The expectation is great.

· · ·

정보이론은 노이즈를 신호의 적으로 정의했다. 통신의 역사는 노이즈를 지우는 기술의 역사였고, 카메라 산업 또한 한 세기 동안 센서의 잡음을 없애는 일에 몰두해 왔다. 홍성용은 이 위계를 정확히 뒤집는다. 모두가 지우려는 것을 유일한 안료로 삼는 순간, 노이즈는 결함이기를 멈추고 발화하기 시작한다 — 지워지던 것들의 언어로.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지각이 눈이 아니라 몸의 사건이라고 썼다. 우리는 망막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몸 전체로 본다. 홍성용의 작업은 이 명제의 보기 드문 실연이다. 정지한 몸에게 이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관람자가 움직일 때에만 작품이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것 — 그것은 지각에 관한 이론이 물감과 렌즈의 형태로 증명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이 작업의 최종 주제는 화면 속 형상이 아니라 관람자 자신이다. 작품 앞에서 몸을 움직이던 사람은 어느 순간 깨닫는다 — 지금 변하고 있는 것은 그림이 아니라 나의 봄(seeing)이라는 것을. 자신의 지각을 지각하게 만드는 장치. 미학이 예술에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임무 중 하나가, 여기서 가장 새로운 기술로 수행되고 있다.

· · ·

오늘날 이미지는 소비되기 위해 만들어진다. 엄지손가락이 화면을 쓸어 넘기는 0.5초 — 그 안에 자신을 다 내주지 못하는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홍성용의 작업은 이 경제를 정면으로 거절한다. 그의 작품 앞에서 정지한 관람자는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한 걸음 옆으로, 다시 반 걸음 — 몸을 움직이는 노동을 지불한 자에게만 이미지는 자신을 연다.

그래서 이것은 이미지라기보다 사건이다. 작품은 벽에 걸려 있지 않고, 관람자와 벽 사이의 공기 중에서 일어난다. 같은 작품 앞에 선 두 사람은 같은 것을 보지 않으며,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도 같은 것을 보지 않는다. 소유할 수도, 복제할 수도, 스크린숏으로 가둘 수도 없는 이 완고함이 — 무한 복제의 시대에 — 이 작업의 가장 급진적인 지점이다.

기술이 화려한 시대에 기술로 침묵을 만드는 일은 드물다. 홍성용의 렌티큘러는 관람자를 놀라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멈추게 하기 위해 움직인다. 움직이는 그림 앞에서 인간이 멈춘다는 역설 — 거기에 이 작업의 품위가 있다.

— SYHONG Gallery Notes